(Feat.위령성월의 끝자락에 전례력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누군가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연령을 위하여 위령기도를 바치면서, 때로는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평상시 죽음에 관해 말할 때는, 그리고 죽음에 관해 들을 때는, 대부분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들을때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거나 듣는 것을 유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의 나의 삶은 죽음과는 매우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네 삶을 잘 살기를 진정 원한다면 실상 그 죽음은 사실 한 인간의 삶과 뗄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쪼록 우리는 죽음을 직시할 때, 우리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지만 동시에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것을 겸손하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중에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겠지만 죽음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1. 사람은 분명히 죽는다.
2. 나 혼자서 죽는다.
3. 그 누구도 죽을 때는 그 어떤 것도 갖고 갈 수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는 것도 알 것이다.
1. 언제 죽을지 모른다.
2.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3.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 품고 있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조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다람쥐 쳇바퀴같은 삶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나눠주신 진정한 ‘나’를 찾아 살아가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각자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직시하며 우리네 삶 안에서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왜냐하면 그 삶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인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덧셈, 뺄셈의 연산능력이 안되는데 미•적분을 잘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네 한계인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어떤 삶이 바른 삶인지 끊임없이 숙고하며, 그 숙고한 것을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다운 삶의 길을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는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기에 우리네 인생 안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며, 이것도 저것도 괜찮다는 상대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옳은 길과 진리의 길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각자의 지경을 넓히며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우리네 인생,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대답해보자.
사람들은 옳은 길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교활하거나 비겁한 길을 가도 세상은 원래 이런거라고 마음쓰지 말라고 속삭여준다. 참으로 치명적인 유혹이다.
먹고사는 일이 결국 삶의 무게로 다가오고,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어깨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떳떳하게 살고자 옳은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죽음을 직시하고 늘 깨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종말론적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락동 본당 공동체가 우리네 삶을 늘 깨어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가운데 새로운 전례력의 시작인 대림시기의 첫 주일을 잘 맞이하기를 희망한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저에게 선종하는 은혜를 주시어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영원한 천상 행복을 생각하고
주님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선종을 위한 기도-
<가톨릭 기도서 중>

(Feat.위령성월의 끝자락에 전례력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누군가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연령을 위하여 위령기도를 바치면서, 때로는 장례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평상시 죽음에 관해 말할 때는, 그리고 죽음에 관해 들을 때는, 대부분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들을때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거나 듣는 것을 유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의 나의 삶은 죽음과는 매우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네 삶을 잘 살기를 진정 원한다면 실상 그 죽음은 사실 한 인간의 삶과 뗄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무쪼록 우리는 죽음을 직시할 때, 우리네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지만 동시에 한낱 미물에 불과하다는것을 겸손하게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중에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없겠지만 죽음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1. 사람은 분명히 죽는다.
2. 나 혼자서 죽는다.
3. 그 누구도 죽을 때는 그 어떤 것도 갖고 갈 수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는 것도 알 것이다.
1. 언제 죽을지 모른다.
2.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3.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 품고 있는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조각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다람쥐 쳇바퀴같은 삶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나눠주신 진정한 ‘나’를 찾아 살아가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죽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각자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직시하며 우리네 삶 안에서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신앙인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왜냐하면 그 삶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결국 신앙인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덧셈, 뺄셈의 연산능력이 안되는데 미•적분을 잘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네 한계인 죽음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어떤 삶이 바른 삶인지 끊임없이 숙고하며, 그 숙고한 것을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다운 삶의 길을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죽음이 끝이 아님을 믿는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믿기에 우리네 인생 안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하며, 이것도 저것도 괜찮다는 상대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옳은 길과 진리의 길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각자의 지경을 넓히며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행동하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우리네 인생,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대답해보자.
사람들은 옳은 길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교활하거나 비겁한 길을 가도 세상은 원래 이런거라고 마음쓰지 말라고 속삭여준다. 참으로 치명적인 유혹이다.
먹고사는 일이 결국 삶의 무게로 다가오고,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어깨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떳떳하게 살고자 옳은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죽음을 직시하고 늘 깨어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종말론적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락동 본당 공동체가 우리네 삶을 늘 깨어 살아가고자 다짐하는 가운데 새로운 전례력의 시작인 대림시기의 첫 주일을 잘 맞이하기를 희망한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
저에게 선종하는 은혜를 주시어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영원한 천상 행복을 생각하고
주님을 그리워하며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아멘.
-선종을 위한 기도-
<가톨릭 기도서 중>